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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티즌

[인터뷰]피치위의 발레리노<대전시티즌 장현규 선수>


장현규.

대전시티즌에서 데뷔.

포항으로 이적 후 상무로 입대.

승부 조작과 관련한 사건에 연루되며 보호관찰 3년을 받고 아버지의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열심히 살고 있던 선수.


그가 오늘(8월16일) 오전,

심장마비로 사망된 채 발견되었다.

장현규라는 선수, 아니 사람은 내가 직접 이야기를 해보고 쭈욱 지켜봤지만 참 성실하고 착하고 올바른 남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의 사건이 안타까웠고, 오늘의 소식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내가 가진 장현규와의 가장 큰 기억과 추억이라면 당연히 아래의 인터뷰다.

당시 인터뷰 진행을 맡았던 난 인간적으로 장현규라는 남자를 좋아하고 응원하게 만들었었다.


비가 그치니 들린 안타까운 소식.

예전에 나누었던 장현규 선수와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보며 그를 추억하고 보내본다.







[인터뷰]축구소년소녀, 축구를 즐기다-피치위의 발레리노<대전시티즌 장현규 선수>


일면 그는 시리고 건조한 음색의 현악기를 마주한 듯 까다로워 보인다. 습기에 온도마저 조절하며 대하여야 할 듯한 긴장감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에게 있을 높지 않은 마음의 문턱 이다. 울산 토박이였던 그가 경상도 억양을 누르느라 건조하고 무뚝뚝해져버린 말씨 때문이기도 하다. 

장현규. 1981년생. 대전시티즌의 수비수. 그에게는 형이 한분 계셨었다. 장현규 선수를 처음 축구의 길에 발을 들이게 했던 형님이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더 이상 나이도 먹지 않고 모습도 변하지 않는 가족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미안했다. 말을 떼기가 힘들었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실의 상처로 남는지,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해도 위로하려 말을 전한다는 자체가 미안한 마음이 되어버린다. 심장을 쓸어내리며 내장 깊은 곳에서 쏟아내던 슬픔과 눈물은 시간이 지남에 조금씩은 잦아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픔이 덜어 졌다기 보다는 그만큼 아픔에 익숙해져가기 때문이다. 아린 상처자국은 여전히 심장에 남아 세월의 요람에서 잠시 잠드는 듯 하다가도 문뜩 덧나 성내기도 한다. 그렇게 덧나지 않을까, 성내지 않을까 염려되었었다.

-솔직히 죄송한 질문이......


“아, 솔직히 저는...... 물어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있겠지만, 형은 저한테는 자랑이고 우상이죠. 형은 장남이고 저는 막내라서 나이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저희 형이 9살 차이예요. 우러러 봤어요. 제가 전에 인터뷰 할 때도 말했는데, 제가 운동신경이 전혀 없었어요. 몸이 뚱뚱했었거든요. 원래, 키도 작고 몸도 뚱뚱했어요.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다니지도 않았고 다른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근데 어느 날 토요일 날이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축구를 하는데 형이 딱 들어오는 거예요. 담임선생님하고 얘길 하더니, 전학처리를 한거예요. 저를. 말도 없이. 부모님한테만 허락 맞고 그 다음 월요일부터 형 친구 분이 축구부 감독님으로 있는 학교, 우리 집에서는 극에서 극인 위치로 전학을 간 거예요.”




“형은 저한테는 자랑이고 우상이죠.”



장현규. 27세. 이제 그는 그의 형이 살아 보지 못했던 나이를 더하며 살아가고 있다. 기억 속, 사진 속에서 형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 같을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변하지 않는 그의 형과 달리 이제 그는 그의 형보다도 많은 나이가 되어간다. 그리고 형의 바람대로 그는 축구를 하고 있고 프로 축구 선수가 되었다. 장남이기에 그의 형이 포기했던 꿈, 동생에게 심어주었던 그 꿈의 씨앗이 꿈으로 묻히지 않고 현실이 되었다. 

“저희 형이 저를 굳이 운동을 시키려고 했던 게, 형님이 운동을 워낙 좋아하셨어요. 맨 처음엔 야구를 시작했다가 집에서 반대를 해서 못하고 그 다음 또 농구 하려다가 못하고 또 축구하려다가도 못했어요. 마지막으로 육상은 하려고 하려던 게 아니라, 취미로 육상을 하셨어요. 제가 봐도 진짜 운동을 잘하셨어요. 집에 있는 사진 보면 전부다 운동하는 사진들 밖에 없어요. 그래갖구 형이 못한 운동을 저한테 시키려고 했던 거 같아요. 부모님을 모두 설득시켜갖고, 부모님께서는 ‘그래 니가 알아서 잘 해봐라.’ 하셔서, 그래 저는 얼떨결에 축구를 하기 위해 전학까지 가게 됐죠. 

“저 되게 많이 맞았어요. 왜냐하면, 감독선생님이 형아 친구니까. 저는 골기퍼로 축구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사이드 수비수를 보다가 미드필더로 뛰어보고, 초등학교 때, 중학교 1학년, 2학년 때, 엄청 많이 맞으면서 했어요. 하기도 싫은 거. 억지로, 형 때문에. 

“그러다가 제가 중2때 사고로 형이 돌아가시게 됐어요. 그리고는 그때부터 키가 갑자기 컸어요. 원래는 152cm 에 52kg 이었어요. 뚱뚱한 편이었는데, 형 돌아가신 후 집도 많이 안 좋았고, 제가 많이 아팠어요. 아프면서 3학년 올라갈 때까지 키가 무려 33cm나 더 컸어요.”




“키가 갑자기 컸어요......많이 아팠어요.”



이유 없이 즐겁고, 이유 없이 화도 낼 그런 시절에 집안의 기둥이었을 장남인 형을 잃어야 했고, 고치를 벗어 던지듯, 그렇게 한꺼번에 커버렸다. 폭풍우 속에서 삐걱거리는 나무틀의 성난 소리마냥 성장하는 뼈들은 밤마다 소리를 쳤다. 몇 달 사이 30센티를 넘게 커버린 몸이 얼마나 아팠을지, 가족을 잃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타인은 가늠키 어렵다. 

그 시절 장현규 선수의 두 다리에 찾아왔을 고통은 고치를 벗어던지고 바로 날개를 피는 나비의 화려함이 아닌 지상으로 올라오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와 두 다리를 바꾸었던 인어공주를 연상케 한다. 고운 모래사장의 해변 가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고운모래가 유리조각으로 느껴질 듯 발끝에서부터 뻗어 올라오는 시린 고통을 참으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었을 그녀가 떠오른다. 제 다리이면서도 처음 사용해 보는 듯, 낯설었을 자신의 몸.


“갑자기 크니까 몸엔 힘이 좀 부족했었어요. 갑자기 키가 크니까 한때는 근력이 안 붙어서 스피드도 없었어요. 느렸지만, 스크린 플레이 만은 잘했어요. 그것 때문에 포워드를 보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때부터 갑자기 축구가 재밌게 느껴지는 거예요. 고등학교 올라가서 스피드가 없는 걸 고쳐 보려고 산에 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죽어라 밥도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 아직도 제자신은 제가 빠르다고 느끼진 못해도 다른 분들이 빠르다 말씀해주시는 게 너무 고마워요. 형 때문에 그런 맘을 먹었죠. 돌아가시기 전에 형이 나한테 축구화를......처음으로 사주고, 한 달도 못되어서 돌아가셔서...... 시합 때 만 신었었어요. 

“저는 매 게임마다 형을 위해서 뛰어요. 형 때문에 축구를 하게 되어서 국민의례 할 때나 게임 시작 전에 형을 생각하며 형한테 말을 하죠. 대전시티즌 팀의 선수로써 팀을 위해서 뛰긴 하지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항상 친형, 형을 생각하면서 뛰었어요. 형 때문에 이 길을 왔고, 크게 성공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프로와서 게임 뛰고 있잖아요. 한해 250명 정도가 졸업하면 그 중에 50명 정도 밖에 프로가 못되는데 저는 프로까지 왔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데, 게임까지 뛰니까. 이제 목표가 있다면 대전에서 붙박이 선수가 되는 거예요. 선수로써 화려하진 않더라도 꾸준히 성실하게, 팬들에게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면서 제가 뛸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가고 싶어요.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어요.”




“저는 매 게임마다 형을 위해서 뛰어요.”



‘형은 저한테는 자랑이고 우상이죠.’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가슴에 묻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보아야 하는 죄책감은 그 한마디에 사라질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 ‘형’이라는 존재가 아픔이 아닌, 자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보기 좋았다. 그를 축구의 길로 인도해주었던 빛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건 벚꽃처럼 밝고 연한 색일 듯하다. 마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떠오르던 한 만화의 일부분처럼.

원피스라는 만화에는 한 나이든 의사가 나온다. 이름은 닥터 히루루크. 그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던 장면에서 그의 대사,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아니야. 맹독 버섯으로 만든 스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야. 바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난 죽어도, 내 꿈은 이루어진다. 썩 괜찮은 인생었다. 쵸파.’

그것이 떠올랐다. 죽어서도 두 여자를 사랑의 열병에 행복하게 하고, 질투하게 하고, 들뜨게 하고, 아프게도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처럼,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열 받게도 하고, 가슴이 철렁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현규 선수가 축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면, 그의 축구를 볼 수 있는 대전팬들에게도 장현규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최윤겸 감독님의 첫 작품이라 칭하여 지는 그인 만큼 울산의 시스템에서 울산현대로 입단이 예정되어 있던 그가 대전에 올 수 있었던 길은 최윤겸 감독님과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대전으로 올수 있었던 건 감독선생님께서 저를 이쁘게 봐주셔서 아니겠어요?(웃음) 근데 저는 뽑힌 게 아니고 처음엔 테스트를 받으러 왔었어요. 그때 스카우터 유동우 선생님께서 저희 대학교 코치 선생님하고 선후배 관계였었거든요. 그래서 (김)기홍이는 미리 대전에 가기로 되어 있었고, 저는 연고 때문에 울산으로 가게 되어 있는 상태였어요. 제가 테스트 받으러 왔을 때가 5월, 한창 K-리그는 시즌 중이었어요. 5월 한달 동안 있으면서 진원이형이랑 방을 썼는데 진원이 형 말씀이 없으시자나요.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웃음)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는 생각했었죠. 

“튀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냥 열심히 하자 했는데, 때마침 감독 선생님은 외국인 선수 보러 브라질로 나가계셔서, 코치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널 데리고 있고 싶다 하지만 1년 동안은 그냥 학교에서 훈련하고 다음해에 계약하자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럼 안가겠다, 현대로 가겠다 하고 나서 일주일이 지났는데, 유동우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브라질에서 오시자마자 감독 선생님이 저를 찾으셨는데, 계약이 되어 있지 않자, 유동우 선생님께 말씀하셨나봐요. 감독선생님이 저를 잘 봐주셨고 저도 대전에 오고 싶어 해서 이렇게 인연이 된 거 같아요.




“이런 맛에 뛰는 거 같다.”



“그리고 나서, 제가 첫 데뷔했을 때가 시즌 개막전이었는데, 포항한테 0대1로 졌어요. 그 다음은 성남 가서 2대1로 지고. 제가 뛰는 게임은 무조건 졌어요. 그러다 제가 빠지고 기홍이가 들어갔는데, 지질 않는 거예요. 거의 비기구, 이기구, 8월말쯤인가? 형들이 우수개소리로 ‘너는 들어 오지마. (웃음) 니가 나오면 지니까.’ 그랬었어요. 한번은 농담으로 그럼 둘이 같이 뛰면 어떻게 되냐 했는데 둘이 같이 뛴 게 그때가 수원전이었거든요. 비오는 날. (이)창엽이 형이 득점했던 그 경기요. 후반전에 교체해서 들어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겼어요. 프로 와서 처음으로! 그날은 조금 뛰었는데도 완전히 진짜 완전히 가슴이 진짜...... 그때까지는 그래도 내가 선수니까 이런 생각으로 뛰었는데, 그땐 내가 여기 소속된 일부분이란 게 더 느껴지는 거예요. 비도 오고 기분이 업되는 거예요. 관중도 엄청 많았었어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가 잘 왔구나. 이런 맛에 뛰는 거 같다. 그런 기분을 느꼈어요.”

자신이 뛴 경기라면 세세한 동작 하나까지도 잊는 법이 없다는 머리 좋은 사람인 그가, 비가 오던 수원전을 꺼내들었다. 자신이 ‘대전 시티즌’ 이라는 이 팀의 일원이며, 대전 시티즌이 내 팀으로 느껴졌던 첫 경기 였다고 한다. 

그날, 강정훈 선수의 슈팅 비스므리한 패스를 슬라이딩으로 이창엽 선수가 골대에 밀어 넣은 것이 결승골이 되어 대전은 1대0의 승리를 거두었다. S석쪽으로 공격을 하던 후반전, 빗속의 경기는 전반적으로 지루했었다. 몸싸움이 지나쳤고, 패스는 끊기기 일쑤였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꽃빛 자주색 유니폼이 비에 젖어 짙은 적자주로 변해있었던 것과 헤딩 경합 중 위험하게 떨어지면서, 허리를 아파했던 장현규 선수, 득점 후 환호하며 W석 앞으로 슬라이딩 하였던 이창엽선수와 대전 시티즌 선수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 하던 그들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벤치에 교체되어 있던 혹은 대기로만 남아있던 선수들까지 모두 필드로 나와 빗물에 젖어버린 동료 선수들을 껴안아 준다. 그들의 환호 소리가 높다란 관중석에 까지 올라올 정도로 그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짝꿍으로 함께 대전에 입단한 김기홍 선수는 알리송 선수와 교체해 벤치에 있었다. 경기를 끝내는 휘슬이 울리자마자 필드로 쫓아 나온 그가 정작 달려 간 곳은 장현규 선수가 아닌 숙소에서 함께 방을 쓰고 있던 룸메이트 주승진 선수였던 걸 멀찍이서 지켜보다, 장현규 선수가 버림받았다며 우수개 소리를 하던 팬들. 팬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날의 경기는 유쾌하고 즐거운 기억이었다. 

승리의 축배가 달콤하기도 하였겠지만, 자신이 대전 시티즌의 선수라는 이유만으로도 심장이 떨리었던 것이 데뷔전이 아닌 다른 경기였던 것은 그의 데뷔전이 그닥 좋은 기억으로 남기엔 녹록치 못했었 탓도 크다. 4백에서 주승진 선수를 대신해 풀백으로 출전했던 그가 맞서야 하는 상대는 K-리그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었던 전성기의 코난 선수와 전성기의 우성룡 선수였다.







경기 중, 그것도 프로의 세계라는 곳에서 그가 4백 그리고 풀백을 처음 서보는 어린 선수라는 사실은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경기가 끝나기 직전 인저리 타임에 그에게 날아온, 대전의 마지막 공격 패스를 놓치며 쓰러져야 했을 만큼 데뷔전은 그의 능력치를 초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했던 것은 데뷔전뿐이었다. 매 경기마다 달라지고 발전하는 그는 2년차 징크스도 잊은 채 매년 매 경기 성장해 왔다. 

“(박)철이형, 박철 선배님이었어요. 내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신 게 철이형 이었는데, 철이형도 말씀이 없으신데, 어웨이 가면 철이형이랑 저랑 방을 같이 썼었거든요. 그럴 때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그리고 같은 자리가 아닌데도 많은 도움을 주신 건 1년차 때 (최)은성이형요. 필드까지 나와서 내 위치까지 잡아주시면서 하나하나 다 가르쳐 주신게 이해가 잘 되었죠. 그렇게 형들의 도움이 많았어요. 

“(최)윤열이 형은 보기와 달라요. 이 사람이 진짜 진짜 너무 선배한테 순하다고 말하면 그런데, 너무 순하세요. 운동할 때나 사적으로나 너무 똑같아요.

“그리고 인정하는 건 (강)정훈이 형요. 정훈이 형은...... 정말 볼을 쉽게 차요. 여유가 많고요. 볼을 쉽게 안 뺏긴다는 거. 자신감이 넘치잖아요. 제가 봤을 때 최고죠. 그리고 (조)재민이 형도요.”

-인간성에서는요?

“아......저기......저쪽......”

들리지 않을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킨다.

-이세인 선수요?(웃음)


“네, 너무......”

자신의 이름이 들렸는지 다른 쪽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던 이세인 선수가 대뜸 고개를 돌린다.

“왜?”

“욕하는 거예요. 욕하는 거.”

“어~, 알았어~”

투박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웃음이 한가득 담겨 있다. 욕을 하고 있었다는데도, 장현규 선수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타박도 없이 이세인 선수가 웃어 보인다.

“정말 항상 밝으세요. 너무 밝으면서도 선배들한테도 잘하세요. 제가 선배한테 이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 우리 팀 분위기 메이커에요. 진짜 운동도 성실히 열심히 하시는데 그 외적인 면에서도 칭찬하고 싶어요. 우리 팀에서 세인이 형은 진짜!”

가르쳐 주고, 보다듬어 주고, 사람 좋은, 그들의 후배가 되는 장현규 선수이지만, 그도 역시 누군가에겐 선배가 된다. 그런 그에게 종종 울산대 후배들이 찾아와 대전시티즌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온 길이 틀리지 않았던가 보다.

“저는 (김)용태한테 그랬어요. 용태가 여기 온다고 그랬을 때 제가 솔직하게 말했어요. 냉정하게. 냉정하게 그랬어요. 용태도 현대에서 안 보내줄려고 했었지만, 너 현대가면 게임 못 뛴다. 여기 오면 기회가 많다. 프로는 돈이겠지만, 그래도 니가 너의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그 기회를 통해 너를 보여주고 인정받으면, 그땐 딴 팀으로 갈수도 있고, 돈도 많이 받을 수 있다. 

“저도 처음에 그랬어요. 처음에 돈은 많이 받고 현대에 가서 묻혀봐요. 물론 제가 대전 와서 무작정 게임을 뛴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기회는 많은 꺼라 생각했어요. 저는 게임 뛰는 거 때문에 대전을 택한 거였거든요. 그래 용태한테 그렇게 얘기했죠. 근데, 용태가 ‘형 분위기는 어때?’ 하더라구요. 분위기는 좋다. 혼날 때도 있지만 분위기는 좋다. 형들이 진짜 동생처럼 잘해주고, 선생님들도 너무 좋다. 그런 식으로 얘기했죠. 

“입단하고 나서 처음 울산에 갔을 때, 대학교 감독 선생님께서 ‘너 때문에 애들이 자꾸 대전 가겠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전 이런 말 들으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웃음)”

어느 구석을 보아도 막내 같지 않은 막내였다. 이세인 선수가 그를 처음보고 선배인줄 알았다는 데에 은연중에 동의하고 있었을 만큼, 그는 점잖고 어른스럽다. 그렇게 언제나 모범생이었을 듯한 장현규 선수가 무려 추적 60분에 나온 적이 있었다는 고백은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고등학교 때 도망이란 건 2번 가봤어요. 그게 또(웃음) 제일 추억이라면 추억이죠. 이게 사람들 선입견에 나쁘게 보면 나쁘게 볼 수도 있고 재밌게 보면 재밌게 볼 수도 있는 이야기 인데요. 제가 처음 도망가서 어떻게 잡혔는지 아세요? TV에 나와서 잡혔어요.(웃음)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인데요. 추적 60분에 찍혀서 어디 있는지 들통이 났어요. 어떻게 우리가 찍히고 싶어서 찍힌 게 아니고, 그때가 한참 여름이었는데, 가출한 여자애들 찍어서 나오는 건데, 우연히 잡힌 카메라에 저희가 나왔었어요.




“추적 60분에 찍혀서 어디 있는지 들통이 났어요.”



“울산에서 도망쳐서, 친구들 많은 천안으로 왔는데, 그때 대천해수욕장으로 놀러갔어요. 해수욕장에 여자애들이 많으니까, 거기 와서 찍었는데, 하필 우리가 뒤에서 노는 게 보인 거예요. 울산에서도 그걸 봤나 봐요. 그래서 바로 잡혔죠. 그게 제일 억울하고 되게 웃겼어요. (웃음) 억울해서 제가 물어봤어요.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았냐고 했더니, 티비에서 봤다고.” 

가출에 추적 60분이라는 거친 단어들이 나오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에 대해 너무 고지식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까다롭고 섬세해 보이는 첫인상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냉정해 보인다는 그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장현규 선수가 가지고 있는 필드에 대한 욕망은 작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인터뷰 당시 부상 중이었기에 더더욱 뛴다는 것 자체에 대한 애정이 숨겨지지 않았다. 

부상 때문에 뛸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길어지는 한숨만큼이나 축구에 대한 욕심이 커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2001년 울산대학시절, 월드컵 대표팀과의 연습시합에서 김도훈 선수와 부딪쳐 발가락이 부러지고 6개월을 쉰 적이 있었다. 하지만 프로 데뷔이후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부상에 시달렸던 적은 없었다. 


“맨 처음 감독 선생님도 걱정하셨던 게 의욕이 넘쳐서 또 다치면 안 되니까, 감독선생님께서도 저를 좋게 타이르셨죠. 그냥 이번 전지훈련에는 남아 있어라 하셨는데 제가 끝까지 간다고 그랬거든요. 

“발목을 다친 게 프로 와서 두 번짼데, 이렇게 아파본적은 없었거든요. 웬만큼 아픈 건 참고 했는데, 이건 도저히 못 참겠드라구요. 그래 거제도 가서도 계속 다친 상태여서 거제도 2차 훈련 갔을 때도 도중에 돌아왔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볼 만지고 있다면 즐거운 축구. 축구는 볼이 있어야지 하는 거잖아요. 볼만 있으면 즐겁죠. 공 없이 뛰어다니면 뭐해요. 힘만 빠지고. 공찬다고 축구하는 건데, 어떻게 보면 멍청한 생각이지만, 축구 선수인 이유- 그건 공을 차는 거잖아요. (지금 부상중이라) 속 시원하게 뛰어 다니고 싶어요. 공도 뻥뻥 차보고 싶고, 제대로 차본 게 지금 석 달이 넘었거든요. 석 달이 뭐야, 한 넉 달이 다되었네.




“공도 뻥뻥 차보고 싶고......”



“감독 선생님이 수비수 출신이시잖아요. 감독 선생님 접하기 전에는 감독 선생님의 축구는 수비 위주의 축구 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아니더라구요. 감독선생님이 패싱 게임의 축구를 추구하시는데, 저는 이런 패싱게임의 축구는 프로와서 처음이었어요. 대학교 때도 패스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하진 않았거든요. 근데 감독선생님은 선수들이 게임을 하면서도 재미를 느끼게 축구를 하세요. 자기 스스로의 몸의 상태를 끌어올려서 재밌게 하는 축구, 패스 많고 왔다갔다하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죠? 보는 사람도 재밌는데, 우린 더 재밌어요. 감독 선생님이 그런 축구 위주로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그런 거 같아요.”

-다시 그라운드에 섰을 때 무의식적으로라도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남진 않을까요?

“생기긴 생기죠.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래도 제가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해야죠. 막을 건 막아야죠. 그만큼 대비를 하면서 준비해야죠. 제가 복귀를 한다고 바로 게임을 뛰는 건 아니잖아요. 팀 훈련을 하면 또 우리 팀 선수들끼리 부딪쳐보고 하기 때문에 게임에선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피스컵 때 경기 관전을 위해 대전 선수분들이 관중석으로 올라오면서 성남 팀에 외국인 선수를 보며, 어떤 선수가 ‘야, 쟤 진짜 잘한다. 후기리그때 어떻게 하냐?’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장현규 선수가 ‘어떡하긴요. 막으면 되죠!’ 하고 딱 올라가셨거든요. 실력이 출중한 선수들과 맞붙기 전에 걱정을 하는 편인가요?

“걱정을 안 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걱정을 좀 하긴 해요. 솔직히. 하지만 이왕 하는 거  자신있게 하는 거죠. 뚫리면 뚫리는 거고. 막으면 막는 거고, 솔직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무대포 정신이죠. 어차피 하는 건데, 기죽고 들어갈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첨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진 않아요.”




“첨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진 않아요.”



아르헨티나 출신의 레알마드리드 선수였던 호르헤 발다노가 말했다.

‘어린 아이와 볼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커다란 행복감에 빠지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면서 그 아이는 더 이상 볼을 독차지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이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되는 순간 축구는 시작된다.’

수비수란 한 아이만이 볼을 독차지 할 수 없도록 달려들어 뺏어내는 입장이다. 혼자서 볼을 독차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하는 수비수는 자만에 빠져있거나, 우둔하고 판단력이 느리다 손가락질 받는다. 그들은 언제나 희생을 요구받는 위치에 서있다. 

사람들은 재밌는 축구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재미난 축구는 수비수가 몸을 던져 상대의 득점을 막아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수비수를 제치고 득점에 성공하는, 다 득점의 경기를 이야기 한다. 공격패스의 미려함은 칭찬 받을 수 있어도, 수비라인의 패스는 때론 자신들의 서포터들에게마저도 야유를 받기 일쑤다. 

하지만, 모든 축구팀에는 수비수가 존재한다. 그들은 현대의 재미난 축구를 막아서는 방해꾼이다. 

정말 입니까?

골을 넣는 모든 경기가 재미있었을까? 데닐손 선수급의 예술적 난이도 높은 동작으로 얻어내는 골이 아니고서는 감흥이 오지 않는 무딘 심장을 지닌 이들에겐 득점만 이뤄진다면 어떠한 경기든 재미있는 경기라는 동의는 어려울 듯하다. 그저 그런 골에서 그저 그런 골이라 할지라도, 그 한골로 팀이 승리하고, 팀의 승리로 내 팀의 선수들이 웃으며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메리트 제외한다면, 경기 자체에서 진실로 축구의 재미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인가?

선수가 특정 직업군의 기능인들로써만 여겨지질 않고, 매일 보는 그 등짝들이 내 자식 같고 동생 같은 일방적인 친근감을 소유하고 있는 한 팀의 골수분자가 된다면, 물론 그 팀의 선수들이 웃고 행복해 하는 것만으로도, 그 경기의 의미를 얻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말하는 재미난 축구가 한 팀에 대한 지엽적인 사랑이 흘러넘치는 특정 팀의 팬들만을 위한 재미를 칭하고 있진 않다. 하지만 공격축구는 득점하는 축구이며 득점은 축구에서 모든 것의 상위라 불린다. 골 수당과 승리 수당으로 더 많은 돈을 받아 낼 수 있는 축구를 공격축구라 하고 싶다면, 쇼를 공격축구라 칭하는 이들이 굳이 틀렸다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축구장을 찾는 이들이 아닌, 자본의 이해관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팬들의 입장에서까지, 돈을 많이 버는 축구장, 돈을 많이 버는 축구만이 최고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함께 칭얼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모든 축구팀에는 수비수가 존재한다. 피치에는 11명의 아이들이 서있었고, 다시 22명의 아이들이 서있다. 어느 누구도 90분 내내 볼을 독차지 할 수는 없다. 누군가 혼자 볼을 독차지 하고 있다면, 그것은 축구가 아니다. 11명의 아이들이 22명의 아이들이 모두 함께 볼을 향해 달린다. 자신을 위해 볼을 차지하기 위해서, 팀을 위해 볼을 차지하기 위해서. 뜨거운 숨을 내뿜고, 뼈가 부서질 듯 서로의 어깨를 부딪친다. 

수비수, 그들은 그 11명의 22명의 아이들 중 하나이다. 둘이다. 셋이다.

상대의 드리블 루트를 손바닥에 놓고 읽는 듯, 별다른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 기다린다. 현란한 드리블을 선보이며 그를 현혹시키려는 상대가 민망하도록 미동도 없이 지켜만 보다가 발만 톡 가져다 대며 공을 빼내버린다. 우악스럽기 그지없고 욕심 사나운 상대의 공격수들의 몸에 맞서 싸운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새처럼 공중을 장악하며 자신의 팀에 대한 도전을 가차없이 차단한다. 멈출줄 모르고 질주하는 자동차마냥, 공과 함께 달려오는 공격수를 향해 몸을 던진다. 그의 발밑에서 구르고 있는 공을 향해, 하나의 몸이 하나의 저격 미사일이 된 듯, 날려진다. 자신의 몸, 상대의 몸, 관성과 볼의 속도와 방향, 잔디의 상태와 두려움, 지난 부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동, 수많은 가능성들을 순간의 짧은 시간동안 가늠하고 판단해야하기에, 깔끔하게 클리어 되는 태클은 순간 경이롭기까지 하다. 

볼이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된 축구 안에서 장현규 그는 대전시티즌의 수비수이다. 볼을 만지는 게 즐겁고, 그것을 뻥뻥 차대며 심장이 터질 듯 달리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는, 수비수이다.

-마지막으로 퍼플크루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대전시민들이랑 퍼플크루랑 같은 거잖아요. 이런 말하면 퍼플크루 분들이 화내실지 모르겠는데요. 가끔은 지나치다 할 때도 있네요. 일단 선수들이 뛰고 있을 때는 경기를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어떻게 보면 너무 좋아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지만 가끔은 그럴 때가 있어요. 

“하지만, 퍼플크루 분들이 우리한테 해주는 거, 신경써주고 항상 옆에서 지켜봐주는 거에 비해서 우리가 너무 부족하다는 걸 알아요. 솔직히 이기는 모습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근데 축구가 그게 쉽진 않으니까...... 그런데 그것마저도 이해해주시니까. 열심히 뛰기만 해도 고맙다고 해주시니까. 우린 그거 때문이라도 더 이기고 싶어요. 더 열심히 뛰려고 해요. 항상...... 

“하지만 영원히 선수로 뛸 순 없으니까, 제가 팀에 언제까지나 있을 순 없을 거예요. 세인이형도 글코. 세월이 흐르면 지금 있는 선수들이 다 나가고 어린 새로운 선수들이 들어올테죠. 그러면 그 선수들이 다시 나이 들 때까지 대전시티즌 항상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세요.”




“그 선수들이 다시 나이 들 때까지 대전시티즌 항상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세요.”




※ 인터뷰 진행을 맞아주신 퍼블(쵸파블)님,

그리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장현규 선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